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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속에 빛난 전주의 힘

전북 전주시 덕진구 소재 ㅁ실업은 직원 48명 규모의 세탁업체다. 전주 시내 병원에서 나온 환자복과 시트, 담요를 수거해 세탁하는 일을 한다. 임직원 절반 이상(25명)은 장애인 노동자다. 평균 근속연수는 18년. 임직원 대부분이 60대 이상 고령이다. 1995년 설립한 이 회사는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2015년 메르스 사태도 무사히 넘겼다.


그런데 코로나19는 달랐다. 회사의 주 거래처인 병원들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일감이 끊겼다. 일반 환자가 입원하지 않아 세탁물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지난 2월을 기점으로 매출이 감소하더니 3월에는 전년 대비 10분의 1수준까지 떨어졌다. 전 임직원 임금을 10%가량 삭감했다. ㅁ실업에서 23년째 일하고 있는 김진숙씨(가명)는 “어렵다고 해도 이번처럼 월급을 깎은 것은 처음”이라며 “직원들이 월급을 적게 줘도 좋으니 자르지 말라고 얘기하는 걸 듣고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1일 전주시가 ‘해고 없는 도시’ 상생 선언을 한 다음 날 ㅁ실업은 전주시에 고용 유지 지원 신청을 했다. ㅁ실업 측은 “해고 없는 도시 뉴스를 보고 절박한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며 “공과금 지원이라도 받아서 사람을 내보내지 않고 버텨보려고 한다”고 밝혔다. 4월 22일 전주시의 <해고 없는 도시 상담일지>에는 ‘ㅁ실업 지원 요청, 인원 감축 위험 직전, 작업 능률상 감원해야 하지만 인정상 고용 유지할 의향이 있다고 함’이라고 적혔다.

해고 원치 않는 기업 지원망으로 유도

전주의 ‘해고 없는 도시’ 선언은 구속력이 없다. 지역 노·사·정이 합의했지만 강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고 없는 도시는 큰 틀에서 보면 지원 사업의 일종이다. 고용보험 미가입 사업장이 고용보험에 가입할 경우 6개월간 보험료를 지원하고 고용유지지원금의 기업체 부담금은 3개월 동안 전액 지원한다. 해고 없이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에는 특별지원금(500억원)을 통해 0.1% 저금리 대출도 해준다. 물론 지역 내 사업장 모두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아니다. 심사를 거쳐 지원 요건에 맞는 기업에 한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때문에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전주 덕진구에서 인쇄업을 하고 있는 이한영씨(가명·49)는 “해고 없는 도시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나처럼 직원 3명을 두고 있는 영세 자영업자에게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며 “다른 대책처럼 말만 그럴듯하게 해놓고 실속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해고 없는 도시’는 변화를 기대해볼 만한 시도다. ㅁ실업처럼 ‘해고를 원치 않는 기업’을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찾아내 지원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 지역사회에 ‘해고 도미노’를 막는 분위기를 만들어 사업주로 하여금 해고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고용유지지원금 지원뿐 아니라 지방세 유예·공공요금 감면과 같은 지원책도 고용 안전망을 두텁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 황택수 전주시 중소기업과 주무관은 “주로 영세한 기업들이 가족 같은 직원들을 자를 수 없다며 상담 신청을 해온다”며 “도움을 청한 기업이 해고 없는 대상 요건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전문 컨설팅을 통해 지원 방안을 찾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준호 전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첫 시도인 만큼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역의 경제 주체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사회적 대화를 할 수 있는 출발선에 선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해고 없는 도시는 재난 상황에서 등장한 세 번째 ‘전주형’ 모델이다. 앞서 지난 2월과 3월에 진행된 착한임대인운동과 재난기본소득은 해고 없는 도시에 앞서 전주형 모델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3월 27일 전주시는 전국 지자체 가운데 가장 먼저 재난기본소득 신청을 받았다. 모두 5만1626명이 신청했고, 4만125명에 대한 지급이 결정됐다. 4월부터는 선별된 인원을 대상(중위소득 100% 이하·건강보험료 지역 4만7260원, 직장 7만4670원 이하)으로 52만7000원을 지급했다. 신청도, 지급도 중앙정부보다 빨랐다. 재난기본소득을 도입한 최초 사례인 만큼 전국적인 관심이 쏠렸다.

그렇다면 전주시 재난기본소득은 어디에 쓰였을까. 전주시 재난기본소득 사용 내역(4월 3일~24일·선불카드 기준)을 살펴봤더니 상위 50개 업종 가운데 46개가 동네마트와 슈퍼마켓이었다. 나머지 4개 업종은 병원과 도시가스, 주유소, 정육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재난기본소득은 먹고 치료하고, 이동하고, 공과금을 내는 데 쓰였다.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급한 불’을 끄는 데 쓴 것이다.

선별 대상에 한해 제한적으로 지급한 돈이지만 바닥 경기는 생기가 돌고 있다. “빨간카드로만 하루에 90만원어치를 판 적도 있어요. 빨간카드 아니면 여기 장사 안 됩니다. 그거 나오고 나서 돈이 돌고 있어요.” 5월 12일 전주 완산구에서 만난 유성배씨(62·의류 소매업)의 말이다. 유씨가 말하는 빨간카드는 재난기본소득을 쓸 수 있는 선불카드(전주함께하트카드)다. 유씨는 “빨간카드 손님이 많이 사가는 게 겨울 내복이에요. 의외죠. 저도 놀랐어요. 손님들에게 물어봤더니 먹을 거 사먹으면 사라지니까 아깝다고…. 지원금 남았을 때 겨울 준비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올해는 다들 먹고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전주에서 시작한 재난기본소득은 경기도를 비롯한 타 지자체와 중앙정부로 확산됐다. 현시점에서는 이른바 ‘대세’ 정책이 됐지만 전주에서 도입을 논의했던 시기만 해도 보수 야당을 중심으로 ‘지자체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포퓰리즘’ 정책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재난기본소득을 두고 갑론을박을 하던 사이 취약계층은 무너지고 있었다. 전주시가 재난기본소득 지급과 동시에 진행한 ‘코로나가 경제활동에 미친 영향·응답자 3504명’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29%가 코로나 이후 월소득이 50만원 이하로 떨어졌다고 답했다. 코로나 이전(7%)과 비교하면 4배 가까이 높은 수치다. 코로나 전 대비 월 소득 100만원 미만 가구는 15% 이상 증가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들의 88%는 ‘코로나19’를 원인으로 꼽았다. ‘올 들어 극단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26%가 ‘그렇다’고 답했다.

생계 지원하고 지역 살리는 ‘빨간카드’

지난 5월 4일 전주 완산구 한 공원 쉼터에서 ㄱ씨(63)가 숨진 채 발견됐다. ㄱ씨는 재난기본소득 지급 대상자다. 4월 7일부터 21일까지 관내에서 재난기본소득 선불카드를 사용했다. 지출의 대부분 슈퍼마켓과 식당, 병원에서 이뤄졌다. 지급받은 재난기본소득을 모두 소진한 뒤 ㄱ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ㄱ씨는 유서를 통해 생활고를 호소했다. 재난기본소득은 임시 방파제 역할을 했지만 근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중앙정부에서는 기본소득과 같은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안전망을 짜고 지방정부는 지역 취약 계층에 대한 사례별 접근을 통해 지원책을 마련하는 상호보완적인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12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시작된 임대료 인하 운동(착한 임대료)도 처음에는 건물주 14명의 ‘선언’에 불과했다. 이후 전주 전역으로 퍼진 임대료 인하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5월 7일 기준 전주시에서만 900여 개 점포가 공식적으로 임대료 인하에 동참한 것으로 집계됐다. 전주 지역 내 건물주뿐만 아니라 외지인 건물주들이 동참한 결과다. 임대료 인하 점포의 40%가 전체 임대료의 20%를 깎아주고 있다.

전주 덕진구 신중앙시장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안중근(49)씨는 지난 2월 임대료 한 달치 60만원을 면제받았다. 2월은 코로나19 여파로 시장에 이용객 발길이 끊기면서 매출이 거의 나오지 않았던 시기다. 안씨는 “정말 힘들었던 시기에 월세를 아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며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빨간카드(재난기본소득)가 나왔고, 매출이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고생 수학전문학원(덕진구)을 운영하는 김진석(가명)씨도 지난 3월분 임대료 50만원을 면제받았다. 물리적 거리 두기로 임시 휴원을 하면서 수입이 끊겼던 때였다. 김씨는 “사정상 임대료를 일주일만 미뤄달라고 했더니 상가 임대인이 아예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가 가장 막막했던 시기였는데 덕분에 지금껏 학원 운영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착한 임대료 운동은 어디에서 왔을까. 임대료 인하는 건물주의 자발적인 의지로 시작한 운동이다. 다만 이들이 신속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전주시의 ‘사회적부동산제도’와 같은 정책도 한몫했다.

사회적부동산제도는 지난해부터 전주시가 시행한 ‘착한 임대문화’ 유도 정책이다. 한옥마을과 전주 객사길(객리단길)의 급속한 임대료 상승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을 막기 위해 마련됐다. 사회적부동산중개업소 50곳을 지정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서 적정 임대료를 산정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하도록 했다. 전주 도심 건물주들은 사회적부동산제도를 통해 착한 임대료의 선행학습을 한 셈이다. 구본기 생활경제연구소장은 “임대료를 인하한다는 발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라며 “현재 착한 임대료 건물은 전주시가 다져놓은 사회적 연대라는 토대 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경제활성화기본조례’도 제정

사회적 연대는 착한 임대료뿐만 아니라 해고 없는 도시와 재난기본소득과 같은 ‘전주형 모델’을 만들어낸 토양이다. 전주시는 사회적 연대를 기반으로 한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경제 활성화에 상당한 투자를 해왔다. 2014년 지방정부 최초로 국 단위의 사회적 경제 지원단을 신설했고,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경제활성화기본조례’도 제정했다. 사회적 경제는 전주형 독립경제시스템의 한 축이다. 사회적 경제가 활성화될수록 사회적 연대의 고리는 더욱 단단해진다. 전주시가 지원한 마을 공동체 가운데에는 협동조합과 같은 마을 기업, 나아가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곳도 있다.

예비 마을기업인 삼천도시대학협의회(협동조합)는 2011년 전주 삼천2동 주민 6명이 모여 만든 마을 공동체가 시초다. 2015년 온두레공동체 공모사업에 지원해 디딤-이음-희망 3단계 성장 코스를 밟았다. 단계별로 300만원에서 600만원, 1500만원까지의 사업비가 차등 지원된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 한다. 경쟁력 없는 공동체는 걸러진다.

1단계 디딤에 60곳의 공동체가 모였더라도 3단계 ‘희망’까지 가는 공동체는 4곳 정도에 불과하다. 동네 꽃심기로 공동체 활동을 시작한 삼천도시대학협의회는 수제 비누 제작을 거쳐 막걸리빵, 3D 작업을 통한 상품 제작을 통해 수익을 내는 예비 마을 기업으로 성장했다. 임정례 삼천도시대학협의회 기획실장은 “시가 성의 있는 태도로 마을 공동체 육성을 지원하고 있다”며 “공동체끼리 연대할 수 있는 창구도 생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의 소통이 활발해진다”고 말했다.

아이프레임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연대는 재난 상황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다. 지방정부가 선도적 정책을 내놓으면 풀뿌리 공동체가 나서 시민의 참여를 독려한다. 시민의 참여와 지지는 재정·행정역량이 부족한 지방정부에게 선도적 정책을 펼 수 있는 원동력이다. ‘전주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에스비즈뉴스  themomma@themomm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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